지나가기 전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어느 겨울날의 단상

연말에 가족과 함께 서울에 놀러 왔던 여동생이 한 달 반 만에 호주로 돌아갔는데, 그곳은 영상 50도를 왔다 갔다 하는 마치 불가마 속 같은 날씨라고 했다. 돌아갈 때 즈음 이곳은 올해 최저 온도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하루 만에 무려 60도의 기온 상승을 마주했을 터였다. 그녀의 가족은 킹스포트 스미스 공항을 나서자마자 서울의 싸늘한 날씨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는데, 여긴 왜 이리 춥냐고 한 달 내내 투덜댔던 기억은 온데간데 사라진 모양이다.

중국가수 Wang OK, 王澳珂의 ‘Before Spring Ends’라는 곡이 있는데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안갯속에 흩어지는 듯한 보컬로 꽤 유명세를 탔었다. 청각의 경계를 허물며 온몸을 부유하게 만드는 이 곡은,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가기 직전의 공허함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무는 계절을 모른 척하는 게 인간이지만, Wang OK는 이 곡 덕에 그것을 인지할 수 있겠지. 지나가기 직전이라면 아직 지나간 것은 아니니까. 힘들어도 나중에 추억하게 될 때를 상상하면 지금을 즐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여동생이 이처럼 현명했다면 이곳의 추운 날씨를 가는 날까지 즐겼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 겨울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추억하고 싶어졌다. 그리고는 여름에 겨울을 아쉬워하지 말아야지.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쩔 수가 없다’의 초절정 클라이맥스 신에 흘러나왔던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계속 돌려 듣고 있는데, 이 곡의 화자도 역시 ‘Before Spring Ends’처럼 과거와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81년에 발표된 곡이 이렇게 멋지고 세련될 수가 있나? 이 사이키델릭 한 분위기는 다른 어떤 곡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없다. 조용필이 괜히 조용필이 아니고, 박찬욱이 괜히 박찬욱이 아닌 거다. 부러워라. 오디오를 다 정리해 버린 지 오래인데, 다시 묵직한 앰프와 혼자서는 들 수 없는 스피커를 들여 이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이 노래의 가사는 김순곤 작가의 시였다고 한다. 조용필은 이 작가를 만나기 위해 광주까지 내려갔다고 하는데, 그쪽에 공연이 있어 내려갔다가 살짝 들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디테일은 알 길이 없음. 원체 유명한 가수니 공연하러 팔도를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작가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찾아 연고지인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 의리 있네 – 그 전해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허망함을 고추잠자리가 교미하는 모습을 보며 시로 적어 내려갔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고추잠자리’다. 사실 가사에는 교미 관련 내용이 전혀 없는데 왜 굳이 ‘고추잠자리가 교미하는 모습’을 보고 써내려 갔다고 한 걸까? 인터뷰한 사람이 재미있으라고 살을 덧붙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스토리에 유머나 에로를 추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작가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만 애꿎은 질문은 거두고, 조금은 다정해진 겨울 저녁의 공기 속을 한번 걸어볼까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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