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번역하는 기호들: 나의 고통이 영문자와 숫자로 치환될 때

병원 원무과 창구에서 진단서를 받아들 때면, 늘 그 위에 찍힌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질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이, 영문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한없이 건조하게 치환된 순간이다.

우리의 아픔을 규격화하는 첫 번째 잣대는 KCD, 즉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다.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ICD)를 바탕으로 한의학 같은 한국만의 고유한 상황을 덧씌워 만든 거대한 질병분류 체계. 기본 구조는 알파벳 하나와 이어지는 숫자 두 개로 병의 상태나 부위가 복잡해지면 소수점과 숫자가 꼬리표처럼 더 붙는다. 이를테면 ‘E11.2’라는 코드는 신장 합병증을 동반한 2형 당뇨병을 의미하는 식이다. 비용을 청구하거나 증명하려면 예외 없이 이 기호가 진단서에 명기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질병의 주민등록번호라고나 할까?

하지만 병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고, 병원에서는 이것의 상태에 따른 물리적 ‘행위’가 뒤따른다. 여기서 심사평가원이 별도로 관리하는 또 다른 기호 체계가 등장하는데, 바로 의료수가코드가 그것이다.

네가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면, 먼저 해당 상태에 대한 진단으로 ‘K35.8(상세불명의 급성 충수염)’이라는 진단 코드(KCD)가 기록된다. 그 후 의사가 메스를 들어 충수를 잘라내면 ‘Q2790(충수절제술-단순)’이라는 수술 코드가 확정되고, 수술을 마치고 누워 잠드는 종합병원의 6인실 침대로 ‘AB190’이라는 입원 코드가 부여된다.(드물게 질병, 수술, 입원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때로는 신포괄수가제(KDRG)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패키지로 깔끔하게 묶이기도 한다)

결국 진단서의 KCD 코드, 진료비 세부내역서나 수술확인서의 행위 코드가 정교한 시작 톱니바퀴가 되어 신용정보원의 최종 급부 코드를 끌어오게 된다는 이야기.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내가 가입한 보험의 보장금액이 최종 확정된다.

내가 걸린 질병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보상으로 치환되는지에 대해 막연한 의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위와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정확하게 지급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으면 좋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금을 신청할 때 내가 가입한 내용에 대해 적절히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뭘 가입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그런데, 사실 나도 잘 모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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