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 End와 정년퇴직

주변에 아는 분이 정년퇴직을 하신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더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술을 마시고 늦게 자도 아침에 기를 쓰고 일어나야 한다던가,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결론 없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던가, 엘리베이터에서 보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봐야 한다던가, 입기 싫은 양복을 억지로 입어야 한다든가 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분은 우리 회사에 더는 필요하지 않아요 

하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는 기분일까?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하기 전 – 물론 많이 다르긴 하겠지만 – 그런 느낌이었다. 이제 학교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더는 내가 필요 없다는 선고를 정중하게 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짐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가스를 끊고, 냉장고를 비웠다. 그리고, 마지막 날 집 앞의 버스를 타고 California Street의 끝, Lands End에 갔다.

오후 느지막이 도착해서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바람만 세게 부는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한 시간 동안 바다를 쳐다봤었다. 그리고는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이제 가자! 서울로...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 스매싱 펌킨스의 ‘The end is beginning is the end’를 들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었다.

살아간다는 건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며, 어느 것이나 대부분 서로 맞물려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읽던 책을 끝마치고 나면 다른 책을 고르게 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날 바다를 보면서 다시 가벼운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곳에서의 마지막은 서울에서의 시작과 연결되어 있으니 그대로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년퇴직이라고 하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똑같이 Lands End에 서서 태평양을 바라본다고 해도 ‘지겹기 하지만, 저 태평양 건너에서 다시 시작이니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만 같다. 대신 모든 길은 끊기고 더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비통한 기분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어쩌면 쳇바퀴처럼 무한 반복되던 비자주적인 일상에서 탈피하게 된 것에 행복할 수도 있다.

대부분 축하를 하는 것을 보면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하지만, 역시 나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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