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동’과 ‘사케동’

오늘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작업에 문제가 생겼다던가, 처리해야 할 일을 못했다던가, 열받는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꼬리를 물었고, 좀처럼 그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의 때도 상대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나는 횡설수설했다. ‘정신이 없다’라는 표현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날.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가 지나고 있었다. 나는 랩탑을 닫은 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출해야 돼

그 생각뿐이었다. 로비로 내려와서는 차안대(遮眼帶)를 한 경주마처럼 귀퉁이의 회전문만 바라보고 직진했다. 건물을 빠져나와 멍하니 길바닥 타일의 무늬만 보며 걸었다. 그런데, 바닥의 타일이 들쑥날쑥해서 밟으면 달그락 거리는 곳이 꽤 있다. 밑에 흙을 깔고 시멘트를 덮은 후 그 위에 타일을 붙여 고정시켜야 하는데, 시멘트 레이어를 생략했나 보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 앞만 보고 달리다가 이런 타일을 만나면 걸려 넘어져 팔이 꺾이거나 뇌진탕에 걸릴지도 모른다. 강남구청에 민원을 넣어야 하나 생각했다가 그냥 ‘바닥도 종종 내려다보면서 자전거를 타야겠어’ 하고 말았다. 나는 구청에 민원을 넣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다. 
역을 향해 걷다가 문득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을 하늘이 거기 있었다. 걷던 것을 멈추고 잠시 건물 옥상에 닳을 만큼 내려와 있는 구름을 구경하는데, 걷어올린 셔츠 슬리브 사이로 훅 가을바람이 밀려들어온다. 그 바람은 이렇게 내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오늘부터 가을이야. 너만 알고 있으라고.’ 

그 순간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그렇게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면, 지금까지는 망한 것 같던 오늘을 ‘평범한 날’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민 없이 바로 ‘만푸쿠満腹’로 향했다.  

만푸쿠는 ‘만복満腹’ – 배가 가득 찼다는 뜻이지만, 송리단길에 있는 덮밥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곳은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식당이었다. 매번 그 집 앞에는 사람들이 한 블록 이상 늘어서 있어 눈에 띄었다.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나는 그 식당에 갈 일은 없겠지 했는데, 언젠가 늦은 저녁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대기줄이 없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약속도 없고, 배도 고팠던 나는 마치 목적지가 그곳이었던 것처럼 식당으로 들어섰다. 꽤 좁은 공간인데도 테이블이 오밀조밀 꽤 많이 놓여 있었다. 점원의 안내를 따라 조리장 앞 바에 앉은 나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점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그는 최고 인기는 사케동(연어 덮밥)인데 지금은 다 팔렸고, 가츠동(돈가스 덮밥)이 그다음으로 잘 나간다고 했다. 그렇게 주문했던 가츠동은 지금까지 먹어봤던 것들 중 최고였다.


오늘은 식당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식도락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 끄트머리에 가서 줄을 섰다.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던 대기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여우는 이상했던 게 아니었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가까워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리고 네 시가 다 되었을 때 나는 흥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거야.

삼십 분 정도 지나니 내 앞의 대기 인원이 모두 가게 안으로 입장했다. 앉아있었다면 분명히 흥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을 거다.(그때는 서 있었음) 나는 한번 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가츠동을 먹을 수 있었고, 그렇게 평균 이하였던 하루를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니 밖은 어둑어둑했고, 공기는 시원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걸고 제이슨 므라즈의 ‘Frank D. Fixer’를 플레이시켰다. 오늘 만푸쿠는 내게 ‘Frank D. Fixer’였으니까. 

Frank D. Fixer was a handyman 
He could handle anything; he was my granddad 
He grew his own food and could fix his own car 
I watched it all happen in our backyard 
He’d reinvent the part to fix a broken home 
He’d restore the heart 
….

연관 곡으로 그의 ‘Lucky’가 흘러나왔다. 오늘 만푸쿠에서 가츠동을 먹은 건 ‘Lucky’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꼭 만푸쿠의 ‘사케동’도 먹어보고 싶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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