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슈즈와 동지애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 동안 혼자 살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사는 곳을 옮겨야 한다니, 그때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예 엄두조차 안 났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동안 전기, 가스, 인터넷, 핸드폰 등은 그대로 두어도 문제는 없는 건지, 수많은 내 짐들 중 대체 어떤 것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여행으로 잠깐 들러본 것이 다였던 그 도시의 어디에 집을 구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난처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이전에는 하숙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면서 시간에 떠밀려 출국일을 맞이 했었다. 대충 챙긴 옷가지가 든 짐을 들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니 그제야 이역만리에서 나 홀로라는 게 실감이 났다. 공항 바깥으로 나가니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내 비가 내렸다. 비가 오든 말든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비를 피하며 마음속으로 

혼자서 살아내야 해

하며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이후 몇 주 동안은 정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대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뭘 배운 걸까? 수학 문제를 곧잘 풀던 내 능력은, 집을 구하고 생활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집의 공급보다 수요가 높은 샌프란시스코는 맘에 드는 집을 구하기에 녹록한 지역은 아니었고, 호텔 예약 기간이 끝나갈 때 까지도 머물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예약 마지막 날이 되어 호텔 기간을 연장하고, 우울한 상태로 다시 오픈 하우스들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렇게 그날 방문할 오픈하우스에 도착해서 내부를 살펴보고는, 바깥으로 나와 무작정 호텔 방향으로 걷다가 꽤 큰 할인매장 옆을 지나게 되었다. 

살 집도 못 구한 상황에 딱히 사야 할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날 볼 집도 다 봤고 별다른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구경이나 할까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매장 안으로 들어갔었다. 층마다 여러 패션 관련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왜 신발 코너에 끌렸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즈음은 온종일 걸어 다녔으니까 조금 더 편한 신발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꽤 큰 세일 사인이 걸려 있었을까? 어쨌든 나는 그 산더미 같은 신발들 사이에서 무려 세 시간 동안 –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주인을 찾던 수행원처럼 –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찾았다.

신어보고, 걸어보고, 다시 한번 모양을 보고, 제품의 설명서도 유심히 읽었다. 신발의 이음매나 바느질 상태 같은 것도 꼼꼼히 체크했다. 신발을 이런 식으로 신중하게 골라본 건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 같다. 진중한 고민이 끝난 내 손에는 남성용 갈색 보트슈즈가 들려있었고, 그 신발은 만년필의 뚜껑처럼 내 발에 꼭 맞았다.

그 이후로도 그곳에서 적지 않은 신발을 샀지만, 나는 돌아오는 날까지 늘 그 신발만 신었다. 그 신발을 신고 비가 오는, 맑은 또는 흐린 샌프란시스코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그곳에서 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현관 앞에 놓아두고 종종 신었다. 서울의 정신없는 생활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그 신발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오래된 푸조처럼 나를 샌프란시스코의 여기저기로 이끌었다. 자정이 넘어 안개가 내린 퍼시픽 하이츠로, 겨울비가 내리는 프리시디오 안의 스타벅스로, 끝도 없이 올라야 하는 16번가의 타일 계단으로… 그러면, 나는 오롯이 혼자 버텼던 그때의 기억 안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열심히 해봐야지’ 하고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얼마 전 신발장을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신발들을 골라내고 있었는데 그 보트슈즈가 눈에 띄었다. 버리려고 꺼내놓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낡아 보였지만 차마 집어 들지 못했는데, 그 신발은 마치 긴 전쟁 내내 함께했던 늙은 하사 혹은 험준한 시베리아 등반길에 여러 고비를 같이 넘긴 셀파(sherpa)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며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어.’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더 버릴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건 이 신발뿐이니까. 그리고, 언제 또 이곳 생활에 진절머리가 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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