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혼자 산다, ‘한혜진 편’

‘나 혼자 산다’는 굳이 찾아보는 프로는 아니라도 가끔 의도하지 않게 채널을 돌리다 만나게 되면 끝까지 보게 되는 프로다. 오늘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나 혼자 산다’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한혜진이 뉴욕의 중고 벼룩시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전 뉴욕에 혈혈단신으로 입성하여 여러 고초를 겪으며 모델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애증의 도시에 패션위크 초청으로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다. 한때 삶의 전장이었던 그곳은 오래된 회벽처럼 다양한 기억으로 얼룩져 있을 테니 ‘산뜻한 기분으로 가벼운 산책’ 같은 건 그녀에겐 불가능했을 거다. 자신을 녹화해 온 화면을 방송국에서 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고, 다른 패널들도 그 분위기 아래에서 쉽게 가벼운 말을 건네지 못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벼룩시장에서 몇 가지 물건을 구매해 들고는 낑낑거리며 자신이 옛날에 몇 명의 동료와 함께 머물렀던 스튜디오로 향했다. 동네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도착한 그곳은 마지막으로 떠나온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 들어서는 장면 위로 그녀가 8년 전 동료들과 그곳에서 찍었던 영상이 오버랩되는데, 그 안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조금 더 돈이 없고, 조금 더 열정적이고, 조금 더 고민이 많은 그녀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이 좋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하게 이야기하곤 하지만, 실제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아마 저울 위에 이런저런 것들을 올려놓고 한참은 고민하게 될 거다. ‘빅’이라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가 있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로 돌아오는 내용인데,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다시 아이로 돌아가기 전에 어른인 여자 친구에게 같이 아이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싫다고 했고,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 한번 겪었으면 됐다고. 내 말 알겠어? 알리가 없지!

아마 한혜진도 그랬을 거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스튜디오를 보며 가장 행복하고도 불행했던, 자신이 가장 날것이었던 그 시간들을 회상하며 만감이 교차했을 테지.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보겠냐고 한다면 분명히 멈칫하겠지만, 그래도 다시 꺼내어 하나하나 들춰보는 순간은 가슴 따뜻하지 않았을까?


그 프로를 보며 나도 일 년 전쯤 샌프란시스코에서 혼자 보낼 때가 생각났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그곳에서 고군분투했던 그때, 나도 머물렀던 일 년 동안 금문교(Golden Gate)를 세 번 밖에 못 건넜었다. 낡은 스튜디오는 창문을 닫아도 밤에 싸늘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고, 물건을 주문하면 길 바로 옆쪽의 화분 뒤에 놓고 가기 일쑤라 바깥에 있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정류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한참을 기다리게 만드는 뮤니(샌프란시스코의 버스)나 한 시간을 들고 있어도 연결되지 않는 모든 고객센터는 가뜩이나 정신없던 내 하루를 사정없이 갉아먹었다. 그래도, 주말에 프레시디오까지 천천히 걸어가서는 그 안의 스타벅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태평양을 배경으로 팰리스 오브 파인아트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네…’

할 때도 있었으니까. 한혜진도 그 시절, 숙소 앞 계단에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프로를 보며 ‘한혜진은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인이었던 에린 헤더튼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살았기 때문 만은 아니고… 나도 이안 소머홀더와 연인 사이였던 사람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니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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