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작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도착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를 받아오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날씨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얼마 전 해체를 발표한 다프트 펑크가 프로듀스 한 위켄드의 I Feel It Coming을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언제 들어도 이 곡의 보컬은 마이클 잭슨의 환생을 마주하는 것 같다.

대출대에서 건네받은 낡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전은 내게 ‘당신,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하고 빈정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이 책을 초등학교 때 읽었다. 그때쯤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아가사 크리스티 외에도 가스통 르루, 엘러리 퀸 같은 주변 작가들의 작품까지 모조리 섭렵한 후, 커서 형사가 될지 괴도가 될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물론 지금은 형사도, 괴도도 아닌 지나가는 사람 1처럼 살고 있긴 하지만. 

얼마 전에 유퀴즈에 정세랑 작가가 나왔던 편을 보게 되었는데, 유재석의 책 추천 요청에 그녀는 이 책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 책 너무 재밌지 않아요?’

나는 분명히 읽었던 책인데, ‘네’라고 할 수 없었다.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재미있다는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왠지 억울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던 책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고는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을 나와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책장을 넘겼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글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책을 덮고 유튜브에서 와다 카나코의 시티팝 냄새 물씬 나는 ‘不確かな(불확실한) I Love You’를 찾아들었다. 오렌지 로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인데, 농밀하고 중후한 사랑 이야기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수는 짧게 활동해서 일본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슈가맨 같은 프로에 나온다면 ‘와다 카나코가 누구람?’ 하는 반응이었다가 노래를 듣자마자 100불을 달성할 것 같은, 그런 류의 가수다. 어쨌든 이 곡의 가사 중

別れ話しの似合わない
午後の日ざしのテラス
이별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는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는 테라스

이 부분이 왠지 오늘의 날씨와 잘 어울린다. 물론 노래 속의 주인공은 아이스티를 앞에 두고 남자 친구에게 이별의 말을 듣기 일보 직전이지만.

이 정도로 좋은 날씨면 조금 더 돌아다녀도 되겠다 싶어서, 머리를 자르러 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꽤 길어져서 앞머리가 눈을 찌르던 참이다. 전화로 시간을 예약하고는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시간이 좀 남아서 집에 들러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아 다시 ‘0시를 향하여’를 집어 들었는데, 여전히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 빈둥거리다가 아우터 없이 니트만 입고 머리를 하러 다시 밖으로 향했다. 외투 없이 외출할 수 있으면 그건 봄이니까, 오늘은 

봄의 시작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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