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잃다: 향수鄕愁, 커피 그리고, 정체성

친구가 라스베이거스로 출장을 오게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들른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누굴 관광시켜 줄 만큼 알지도 못하지만, 친구도 샌프란시스코에 서너 번은 왔었다니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곳 정서대로 공항에 나가주고 싶었지만, 알아서 올 테니 집에서 기다리라는 친구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온 지 한두 시간 정도 지나니 집 앞에서 내려오라고 전화가 온다. 대충 짐을 집에 넣어두고는 뭘 할까 이야기해 보니, 역시 내 친구 아니랄까 봐 머릿속은 텅 빈 채다. 아무런 생각 없는 둘이 멍하니 앉아있다가 주섬주섬 일어나 향한 곳은 피셔맨스 와프. 친구가 사 년 전에 가봤던 그 근처의 아이리쉬 커피 원조집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다른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우버로 피셔맨스 와프에 도착했지만 친구는 예상대로 어느 집인지 기억을 전혀 못한다. 대충 인터넷을 뒤져보니 의심이 가는 카페가 하나 있는데, 저렇게 생긴 집이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부인을 해대는 통에 계속 그 주변을 배회했다. 더럽게 피곤했다. 

‘그냥 저기 가자. Yelp 평점이 높아.’ 

억지로 끌고 들어갔더니 그제야 벌어진 입으로 떠들어 댄다는 게  

‘안에 들어오니 기억이 나네. 저기 커피 만드는 사람도 기억이 나!’ 

그분일 리가 있나. 더 이상 찾을 자신이 없으니 그냥 이곳이 추억의 장소라 믿고 싶었겠지. 하지만, 나도 더 이상은 찾아다니기 싫어 같이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그게 축하할 일인가?

테이블에는 손님이 꽉 차있어서 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려는데 먼저 신분증 검사를 하자고 한다. 친구가 좋아해서 말은 안 했지만, 이곳은 기력이 다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백발노인이 아니라면 대부분 다 신분증 검사를 한다. 어쨌든 술을 섞은 아이리쉬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니었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던 친구조차도 다 마시지 않았다. 

페리 빌딩에서 저녁을 대충 먹은 후 집에 와서 다음 날 뭘 할까 고민하는데 역시 둘 다 별 생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페블 비치’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어디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우선 의견이 나왔다는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로 맞장구를 쳤다. 지도를 찾아보니 해안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해서 우버로는 힘들 것 같았다. 차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린 차가 없다.  

렌트하지 뭐 

나는 태어나서 렌트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서울도 아닌 이곳에서 그걸 해야 한다고? 친구는 시차 적응이 안 되어 피곤하다며 바로 잠들어 버린다. 혼자 인터넷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수많은 렌트카 서비스 업체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Hertz라는 렌트카 사업체의  홈페이지를 찾았는데, 길거리에서 그 로고를 본 기억이 났다. 그냥 이곳에서 렌트해야겠다 생각하고는 사이트의 예약 메뉴를 클릭했다. 가까운 영업소를 선택하고, 당일에 다녀올 계획이니 기간은 하루를 선택하고, 차종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널려있는 쿠폰 코드를 입력한 후 예약을 완료한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중에 보니 폰용 앱도 있었지만, 딱히 앞으로 또 렌트를 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아 설치는 하지 않았다.(이후로 스스로 렌트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

다음 날 일어나 렌털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렌트할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렌트는 Credit 카드만 가능했고 – Debit 카드는 사용 불가 – 몇 가지 옵션(보험료 등)을 추가하니 어제 예약했던 금액을 훌쩍 넘어간다. 렌트한 차 앞에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나니 렌트가 완료되었다.

친구는 귀찮아서 국제면허증을 만들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운전은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운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으로 차를 집에 세워두기만 했던 사람인데, 게으른 친구 덕에 이역만리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 

친구는 조수석에 앉아 오래전 미국에서 운전할 때 들었던 팁 몇가지를 전수해 주었는데, 

  • 건널목에서 사람이 건너고 있지 않으면 그냥 건너도 됨
  •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무조건 멈추고, 먼저 진입한 순서대로 빠져나가야 함  

그것들이 정확한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대로 운전했을 때 경찰이 뒤에서 쫓아오거나 뒤차가 클락션을 눌러대지는 않았으니 틀린 정보는 아니었나보다. 프리웨이에 진입하고 나서는 직진만 하면 되어 조금 편했고, 유료도로가 종종 나오는데 그때는 진입할 때 요금을 내면 됐다. 미국에 사는 친구들도 생각없이 지나쳐 가끔 기억에 없는 벌금 고지서가 날아온다고 하니, 유료도로 사용법에 대해서는 각자 미리 이동루트를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벌금이 꽤 세다고 함)  


이동길에 있던 몬테레이의 피셔맨스 와프는 시끌벅적하기만 한 샌프란시스코의 그것보다 볼 것이 많았지만, 페블비치까지 가야 하니 대충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 넘게 운전해서 겨우 도착한 그곳은 큰 골프장이었고, 골프를 치는 친구는 그곳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경치가 좋다는 느낌 정도를 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해변은 평화스러웠고, 그 앞 언덕은 마치 땅끝 마을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에 살면 어떨까?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 벤치에 앉아 ‘오늘 하늘은 별로네.’ 하며, 다음 날 새롭게 그려질 하늘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못 가겠지만…

대충 근처를 좀 걸어 다니다 보니 차를 반납해야 할 시간이 다가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친구가 옆에서 쳐 잤기 때문에 훨씬 더 지겨웠지만, 다행히 잘 도착해서 차를 반납할 영업소와 가까운 주유소로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 주유하는지 하는지 알아.’ 

하지만, 친구는 결국 셀프 주유하는 방법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어설프기 그지없는 건 친구가 옆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친구도 어설프기 때문이다. 영어를 못 읽는 것도 아니고, 주유기 옆에 주유하는 법이 다 쓰여있는데도 왜 주유를 할 수 없는 걸까. 친구와 나는 매뉴얼을 탓하며 다른 사람들이 주유하는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봐도 모르겠어. 이러다가는 정말 주유 못하게 될 것 같아 창피하지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모히칸 머리를 한 동양인이었다.  

‘저. 우리가 주유를 못해서….’ 

‘아 저 한국인이에요.’ 

‘(오옷!) 아. 정말요?’ 

‘네. 제 것 하규 일려 줄게요.’ 

한국말을 잘 못하는 한국인이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영어를 저렇게 잘하는데 말이다. 그 친구는 능숙하게 도와주었고, ‘카드 삽입-주유 선택-주유구에 주둥이 끼우기’ 순서로 무사히 주유를 마쳤다.(하지만, 다시 하라면 또 헛갈릴 것 같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는 괜찮다고 하며 차에 올랐다. 우리는 세상 친한 친구처럼 그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차렌트 영업소로 차를 몰아 반납 프로세스를 밟았다. 인수 담당자는 차를 살펴보더니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돌아가는 건 내가 결정하는 건데… 

그날은 정말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버렸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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