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빨래하기

이번에는 세탁 이야기

이사를 한 후 며칠 지내다 보니 빨래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집을 보러 다녔던 다운타운 근처의 스튜디오들은 대부분 지하에 코인 세탁기가 있었는데, 이사 온 곳은 주택가에 있는 집이라 그런지 내부에 그런 편의시설이 없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집에 나만 살고 있나 싶을 정도로 건물 안에서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는 며칠째 부스럭 거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 한 건물에 사는 친구들끼리 서로 들락날락하며 가끔은 옥상에서 같이 맥주도 마시고 하던데, 그렇게 현실감 없이 드라마를 만들어도 되나요? 아니면, 나만 쏙 빼놓고 이전 사람들끼리만 몰래몰래 소통하고 있는 건가? 어쨌든 빨래는 해야 하니 밥 할아버지(집주인)에게 문의를 해보기로 했다. 오늘은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어서 바쁘실 테니 간단히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밥 아저씨, 좋은 집에 살게 되어 너무 좋아요. 그런데, 혹시 세탁을 하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답변 기다릴게요.’

오늘은 야구장이 크게 붐비지 않았는지 밥 할아버지는 빠른 답장을 보내왔다.  

‘내가 한번 입주자들에게 메일을 돌려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물어보겠네.’

입주자들도 딱히 바쁘지 않았는지, 아니면 주인 할아버지의 리더십이 남다른 건지, 밥은 하루 만에 여섯 명의 입주자가 보내온 세탁물 처리방법을 회송해 주었다. 사는 곳은 같지만 입주자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서로 다른 솔루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앱을 활용 (washio, Rinse): 스마트폰으로 요청하면 서비스 제공자가 집 앞으로 와서 세탁물을 받아가고, 다시 문 앞에 배달해 줌
  • 세탁소를 이용: 세탁소에 직접 세탁물을 맡기고, 약속된 기한 후에 직접 다시 찾아옴  
  • 코인 세탁소를 이용: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준비되어 있는 코인 세탁소에 가서 직접 세탁 및 건조 수행

앱은 최첨단이긴 하지만 세탁물을 맡기거나, 완료된 세탁물을 받기 위해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게 별로였다. 세탁소도 하루 이틀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만만한 코인 세탁소를 먼저 사용해 보기로 했다. 코인 세탁소는 이전에 사용해 본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 사실 다른 방법들도 마찬가지 –  우선 그냥 세탁물을 들고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왔다 가면 된다. 어쨌든 시간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종신형 죄수만큼이나 많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인 세탁소가 있다. 천천히 세탁물을 챙겨 너 다섯 블록 떨어져 있는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세탁하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니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돌아가고 있는 기계가 많았는데, 다들 빨래를 때려 넣어두고는 주변에서 볼일을 보고 있나 보다.
벽에 붙은 사용법을 읽어보니, 자동판매기에서 카드를 구매해 충전한 후 세탁기에 붙은 단말기를 태그 하여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 우선 벽의 자판기에서 카드를 구매하고는 20불을 충전했다. 세탁비용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오늘 가져온 세탁물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

세탁 카드 자판기 옆에 세제판매용 자판기도 있는데, 세제의 종류가 마트의 요거트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상표만 다른 같은 제품이 아니라 세제, 표백제, 유연제 등 그 용도도 서로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상세한 설명이 없으니 버튼 위의 이름이나 그림을 보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세제와 유연제는 샴푸와 린스의 관계 같고, ‘Tide(밀물/썰물)’면 헹굴 때 쓰는 건가? 그런데, 헹굴 때 뭘 넣으면 또 헹궈야 하는 거잖아? 그러면 또 세제를 넣고.. 세제를 넣었으니 다시 헹구고..

그건 그렇고 세탁기 문이 닫혀 돌아가는 중에 어떻게 저 부가 세제들을 투여하지? 게다가 똑같은 세제도 가루와 액체, 심지어는 비닐봉지에 묶여있는 것도 있는데, 그 차이를 가늠할 수도 없다. 드라이 시트는 건조할 때 넣으면 옷이 유연해진다고 하는데, 세제 중에도 유연제에는 그런 기능이 존재한다. 대체 유연제와 드라이 시트는 어떤 관계인 걸까? 알면 알수록 빨래의 세계는 깊고 오묘했지만, 그걸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게 문제였다.

대충 감으로 세제와 유연제를 몇 개 구매하고는, 비어있는 세탁기에 세탁물을 때려 넣는다. 충전한 카드를 세탁기의 리더기에 댔더니 ‘띡~’ 소리와 함께 금액이 차감되어 버렸다. 그런데, 빨래를 넣은 기계를 다시 봤더니 세탁기가 아니라 건조기였다. 나는 맥도널드 키오스크(주문대)에서도 주문을 한 후 비슷하게 놀라는 적이 종종 있다.

‘앗, 스프라이트를 주문하려 했는데!’

그럴 땐 그냥 콜라를 마시지만, 건조부터 하고 빨래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 카드를 넣었더니 계산이 되어버렸네요. 취소가 가능한가요?’ 하고 옆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세탁하고 난 후 거기서 건조하면 되지 않을까요?’ 한다.

천재네.

특별히 이 건조기가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다른 빈 건조기도 많으니 그냥 두고 빨래를 한 후 다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몇 주 동안 이곳에서 꽤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봤는데, 정확한 답을 들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모른다고 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 다들 나름대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 넘치는 ‘민간요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 모르고 카드를 댔더니 돈이 차감되었네? 뭐 그랬음 어쩔 수 없고.’ 하며 별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어쨌든 다시 다른 세탁기에 세탁물을 밀어 넣고 카드를 리더기에 댔더니, 바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손을 보니 자판기에서 구매했던 세제를 그대로 들고 있는 나. 후다닥 그것을 뜯어 세탁기 위쪽의 서랍(나중에 알고 보니 세제 투입구였음)을 열고 미친 듯이 털어 넣었다. 나는 그때까지 중간에 세제를 어떻게 넣을지 몰랐는데, 인간의 본능이란 건 정말… 내 동물적 감각에 놀라는 동안 세제는 세탁기 안으로 무사히 흘러들어 갔다. 세탁에 걸렸던 시간은 20분 정도로 가정용 세탁기보다 서너 배는 빨랐다. 빨래가 끝난 후 미리 계산한 건조기에 빨래 더미를 밀어 넣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건조도 20분 정도면 충분했다. 이 정도면 건조를 기다리다가 잠들어버리는 경험 따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작업이 모두 끝난 후 어느 단계에서 생겼는지 모를 향과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빨래를 개며, 이 정도 속도라면 이불 빨래도 한 시간이면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빨래가 취미가 될 것만 같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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