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디오 산책

요즘은 날씨가 참 좋다. 물론 실제로 밖에 나가 걸으면 샌프란시스코의 햇살은 자연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미래 전쟁의 레이저빔 같긴 하지만, 그래도 비가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왠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

어제는 하루 종일 청소와 빨래를 했으니 일요일인 오늘은 좀 쉬어도 되겠지.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 천천히 가방을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준비를 모르는 나는 늘 집 밖 나올 때 목적지가 없으며, 게으르기까지 해서 대부분 집 앞 필모어의 스타벅스에 가는 것이 고작이다. 상상력도 풍부해서 다시 힘들게 돌아올 모습에 질려 멀리 가지도 못한다. 다람쥐였다면 챗바퀴만으로도 충분했을 것만 같은 내 생활 바운더리의 스케일이라니… 

오늘도 언제나처럼 필모어 쪽으로 걷고 있는데, 길 옆의 정거장에 뮤니(샌프란시스코의 버스)가 정차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올라타버린 나. 평소와는 다른 전개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프레시디오’였다.


이곳은 금문 국립 휴양지역이지만, 이전에는 스페인, 멕시코, 미국의 군대 주둔지였다. 몇백 년 전만 해도 세상은 춘추전국 시대로 국가끼리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게 거의 유행급이었고, 이곳 캘리포니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날씨만 좋으면 주말마다 히피처럼 먹고 마시거나 가족끼리 산책하며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군대 주둔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다. 물론 군사주둔지라고 총천연색 건물에 오색등 장식을 해두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곳은 지도만 봐도 금문교 진입로를 빙 두르는 상당히 큰 녹지대인데, 생각보다 관리도 잘 되어있고 내부 구조도 깔끔하다. 밴쿠버의 스탠리 파크가 뉴욕의 센추럴 파크보다 10% 정도 더 크지만, 프레시디오는 그런 스탠리 파크보다도 50%나 더 크다고 한다. 엄청나다. 엄청나다고 말하긴 했지만 애초에 스탠리 파크의 크기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감도 없긴 하다. 그건 그렇고 서양사람들에겐 공원이 삶의 퀄리티를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건지, 도시마다 수백 미터 간격으로 크고 작은 공원들이 즐비해서 놀라게 된다. 걷다 보면 공원이고, 앉아있다 보면 공원이다.

프레시디오에는 ILM의 레터맨 디지털 아트센터가 있는데, 그 뒤뜰에 작은 요다 분수가 있다. 요다 동상이 동쪽을 보고 있어 오후에 가면 햇빛 때문에 정면에서 얼굴을 보기 쉽지 않으니 되도록이면 오전에 들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분수 뒤쪽 건물을 들어다 보면 안쪽에 스타워즈 제국군 등신 모형도 구경할 수 있는데 퀄리티가 너무 좋아 마치 사람이 가면을 쓰고 서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다지 재미는 없음.

공원 안에는 스타벅스도 있는데 한참 바글바글하다가 오후 여섯 시가 넘으면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커피를 마시던 관광객도 책을 읽던 근처 주민도 모두 천천히 집으로 향하고, 포스에서 주문을 받던 스타벅스 레게머리 총각만 바닥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빨리 집에 가고 싶겠지. 해가 넘어간 후 조용해진 공원은 생각보다 으스스한데 그늘진 큰 나무 뒤에서 도끼를 든 연쇄살인마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사실 조용한 숲이면 목사님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무서울 것 같긴 하다. 

어둑어둑해지니 조금 무서워져서 공원을 나와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의 올림픽 공원이 그리워졌다. 거긴 안 무서운데… 서울에 가게 되면 천천히 한번 다시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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