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사각사각 필기구에 종이가 긁히는 소리, 너무 좋지 않나요?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런 이유로 이런저런 만년필 혹은 펜을 꽤 많이 사모으는 편인데, 디지털 시대에 진입한 이후로 노트와 펜이 주변에서 사라지는 추세라 아쉽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데, 누구를 좋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는 거. 이러다가 펜이나 노트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모두 ‘이젠 더 이상 필기도구를 생산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선언해 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매년 12월 10일은 [세계 필기구 생산 중단의 날]입니다.’
아쉽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기다란 막대기 끝에 종이에 묻어나는 물질을 붙여 넓적하고 밝으며 평평하면서도 얇은 것에 슥슥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다고 해요.’
안 그럴 것 같지만, 지금도 먹과 벼루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비닐에 썼다는 건가요?’
무식해. 어쨌든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나는 펜이 꽤 많은 편인데, 최근까지 잘 사용했던 애착 펜을 하나 소개해보려 한다.(빌드업이 너무 장황해서 죄송)

드래그리펠 볼펜은 독일의 프리미엄 필기구 브랜드 로이텀(Leuchtturm1917)의 제품이다. 로이텀은 1917 독일에서 설립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정통 문구 브랜드인데, ‘드레그리펠(Drehgriffel)’ 볼펜은 ‘돌려서 쓰는 필기구’라는 뜻으로 로이텀의 상징적인 라인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볼펜의 디자인은 로이텀이 설립된 시기인 1920년대에 많이 사용되었던 연필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육각형 모양의 몸통은 안정적인 그립감을 제공하고, 책상 위에서 쉽게 구르지 않는다. 간결하고 심플한 실루엣은 클래식하면서도 뉴트로적 감성을 자극한다. 펜 전면에 새겨진 드레그리펠 로고의 서체는 독일의 역사적 서체인 ‘Sütterlin’을 사용하여 그 시대의 분위기도 한껏 살아있다.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와 ‘저먼 디자인 어워드(German Design Award)’ 수상 경력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한마디로 세련되고 멋지다.
교보문고는 2021년 자신들의 40주년을 기념하여 로이텀과의 콜라보로 이 볼펜을 발매한 적이 있다. 위 사진의 제품은 로이텀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모노클과의 콜라보인데, 교보문고의 콜라보 제품과 색깔이 동일하다. 어쨌든 나는 이때 이 볼펜을 구매했었고, 지난주까지 정말 잘 사용했었다.
개인적으로 손에 착 붙는 황동/알루미늄 합금의 묵직한 바디부터 마음에 든다. 0.5mm로 세필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0.7mm 이상은 프랑켄슈타인이나 네안데르탈인용 아닌가? 세필도 힘들고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나는 만년필도 무조건 EF) 만약 연간 수조 원을 벌어대는 기업의 총수라면 그런 펜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결재 사인이 섬세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사인 옆에 귀여운 그림을 그려주고 싶어 질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부드러운 저점도 유성잉크를 사용해서 필기감도 아주 좋다. 리필심도 국제 표준 규격인 ‘파커 스타일 G2 규격’이기 때문에 타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해 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로이텀 리필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그런데, 이번 주에 생각 없이 펜을 분리해서 바디 내부 밀링 퀄리티를 확인하고는 – 역시 엄청난 퀄리티였음 – 선단先端(펜의 앞쪽 끝부분) 안쪽을 들여다봤다. 분명히 스프링이 존재해야 하는 위치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어떤 구조인지 궁금해져서 펜촉을 사용해서 억지로 스프링을 들어내봤는데, 갑자기 툭(아앗)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튀어나가 버리고 말았다. 찰흙 같은 것과는 달리 낙하 이후에도 얼마간은 예측불허 움직임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톡톡 튀어서 쥐며느리 집 혹은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친구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 버렸겠지.
나는 깨끗하게 포기하고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