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만의 랭킹

워크데이는 더디게 가는데 주말도, 한 달도, 일 년도 쏜살같이 지나가버린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실제로 그런 걸 어쩌나… 

매 해의 끝자락에서 생각해 보면 작년보다 올해가 특별히 별달랐던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똑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작년과 비슷한 범례凡例에 서로 다른 탑 랭커를 얹게 될, 올해 나만의 랭킹을 시작해 볼까?

1. 올해의 사건: 교통사고

누가 뭐래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올해의 이벤트는 단연코 교통사고다. 자전거로 대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이면도로에서 튀어나온 자가용에 측면을 들이 받혔음. 난생처음으로 119를 탔고, 응급실도 갔었다. 전신 엑스레이를 찍고 간이침대에 누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심박수가 낮아 비상벨이 울려 간호사가 뛰어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내 심박수가 원래 좀 거북이 같음. 어쨌든 다들 차조심.

2. 올해의 노래: Olivia Rodrigo의 ‘Vampire’

‘2023 나의 스트리밍 리포트’를 읽었던 분들이라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멜론에서 애플뮤직으로 갈아탄 4분기에 난 이 곡을 난청이 될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스트리밍 리포트의 구닥다리 음악들과는 차원이 다르죠? 심지어 엄청난 신곡이며, 4분 남짓 되는 곡에 뮤지컬 한 편을 담아버린 듯한 꽉 찬 구성을 자랑한다. 

올해는 아쉬운 넘버 2까지 공개: The National의 ‘New Order T-Shirt’.

3. 올해 발견한 degeneration(퇴화): 4K 음역대 난청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은 다음 날,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침을 삼켜도, 이퀄라이징을 해도 나아지지 않음. 우주유영하는 듯한 느낌으로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보이저의 골든 레코드 재생 소리가 나는 디바이스로 한 반시간 동안 청력 테스트를 한다. 되게 지루함. 

결과는 ‘저음성 난청’으로 스트레스 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이란다. 하지만, 그 테스트로 4K 음역대의 청력에 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 소음 속에 파묻혀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발생하는 현상이라는데, 내가 일하는 곳은 진심 조용하기 짝이 없다. 빌어먹을 이어폰, 풀볼륨, 헤비메탈.

4. 올해의 뮤지션: 비틀스

천국과 이생의 콜라보를 통해 리얼 신곡을 발표한 레전드 그룹. 그들의 ‘Now And Then’은 딥러닝을 사용해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의미 있는 산출물이라고 생각함.

5. 올해의 재발견: 파파이스

언제 적 파파이스야? 그런데, 루이지애나 클래식 버거는 파이브가이즈,  셰이크 쉑, 슈퍼두퍼 다 몰려와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맛있음. 참고로 파이브가이즈의 패티 두 개는 먹다 지루해서 혼났다. 

6. 올해의 귀여움: 고윤정

‘무빙’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들고, ‘이재, 곧 죽습니다’를 보고 싶게 만드는 주역. 

7. 올해의 드라마: 무빙

오랜만에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봤음. 아주 가끔 – 고윤정이 안 나오면 – 살짝 지루할 때가 있지만, 이 정도로 완급조절이나 분량배분이 황금비인 드라마는 오랜만. 

8. 올해 최악의 예능: 코미디 로얄(넷플릭스)

진심 더럽게 재미없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음. 메타코미디의 유튜브 클립을 가끔 재미있게 보긴 했었는데 이 프로 이후 정이 뚝 떨어져 버림. 곽범과 박진호는 진짜 최악. 그래도 술자리에서 함께 있으면 보통 사람들보단 웃기겠지? 제발 그렇길 바람.

9. 올해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보긴 이것저것 꽤 많이 봤는데 기억에 남는 건 이 작품. 토이스토리적 감성의 로켓 과거 스토리에 눈물 찔끔.

10. 올해의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책들 보다는 몰입해서 봤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재미는 그다지… 만약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차라리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권하고 싶음.

11. 올해의 디바이스: 맥세이프 3단 충전기

맥세이프를 지원하면서 3단으로 접히는 충전기로 폰과 애플워치와 에어팟을 동시에 충전할 수 있다. 꽤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음. 충전속도가 느린 게 싫어서 계속 유선충전만 고집했었는데, 막상 사용하고 나니 충전할 필요가 없어도 자꾸자꾸 올려두고 싶어 진다. 왜인지는 모름. 

12. 올해의 테크놀로지: 작년에 이어 계속 ChatGPT

아직까지는 누가 뭐래도 독보적이다. 연달아 소개하는 서비스들도 놀라움의 연속. 어느 순간 모든 인간의 뒤통수를 탁 칠, 아니 목을 툭 꺾을 때가 올 것임을 확신한다. 상상력 뛰어난 인재 없이 차세대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기업이 있다면 6개월만 기다렸다가 진행하라고 충고하고 싶은데, 그 안에 텐저블한 적용 예제들이 쏟아질 수 있기 때문.

13. 올해의 게임: 바이오하자드 RE 3

사람들은 짧다고 욕하지만, 나는 짧아서 좋았다. 덕분에 올해 엔딩을 본 유일한 게임.(바이오하자드 RE 4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칭찬을 하길래 사긴 했는데, 처음 마을에 진입한 후 좀처럼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음)

사실 거의 엔딩을 볼 뻔한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데스 스트렌딩이라는 게임. 세계관이나 분위기는 기존 어떤 콘텐츠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멋진데, 게임의 내용은 택배 배달. 택배를 둘러메고 산 넘고 물 건너 이동하면서도 ‘대체 내가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음. 뭔가 있겠지…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14. 올해의 맛집: 모던샤브하우스

특정 식당 이름을 써도 되나? 하여간 맛있음.

15. 올해의 대결: 예고 노래방 배틀

프로젝트 개발자와 한잔 하는데 자신이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 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그런 오만은 지나가는 이야기라도 쉽게 인정할 수 없음.

‘음, 잘 못할 것 같은데요?’

저런 소리를 잘도 하는 나. 그게 도발이 되어 다음에 노래방을 가기 위한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태어나서 예고 노래방은 또 처음. 몇 주 후 프로젝트 인원 몇 명이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는 세 개의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했다고 한다. 첫 곡의 컨디션을 봐서 적절한 리스트를 선정할 예정이라나… 건방져.

그렇게 회식 후 노래방에 가서 그가 부른 첫 곡은 ‘With Or Without You’. 부르기 어려운 곡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살리는게 만만한 곡도 아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부르네? 당황하고 있는 사이 바로 리모컨으로 다음 곡을 찍는 그분. 흘러나오는 전주는 엘튼 존의 ‘Crocodile Rock’? 이 곡 보컬의 다이너미즘은 거의 뮤지컬 급이잖아. 멘털을 부여잡고 발랄하게 불러대지 않는 한 2절 진입 전에 스스로 종료버튼 누르는 건 따놓은 당상. 그런데 이걸 또 불러 낸다. 뻔뻔해. 얼굴에 철판을 깔았어. 다음 곡은 크렌베리스의 ‘Zombie’. 아니 80년대 영혼의 부활인 건가? 게다가 이건 여자 보컬이잖아. 하지만 목소리까지 살짝살짝 뒤집으며 비슷하게 불러내는 개발자. 

냉정히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감탄을 하고 있긴 하지만, 감동을 받고 있는 건 아니야. 물론 음정, 박자나 인토네이션 등이 원곡과 너무 흡사하긴 해. 아아… 어디선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 이건 인공지능의 노래. 개발자는 논리적 사고 능력을 사용해 노래 부르고 있었다. 보컬의 진행이 코드에 의해 구현된 것이라 생각하면 납득이 가. 삑사리 한번 안나는 건 미리 다 에러 핸들이 되어있기 때문인 거야. 너무 건조해. 완벽하지만 외로워. 인류의 미래가 이건가…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 재미있긴 했음.

16. 올해의 운동: 사이클링

주말마다 꾸준히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함

17. 올해의 끈기: 독서(feat. 호프 자런의 ‘랩걸’)

이 책을 몇 년째 읽고 있는 건지 이젠 가물가물 할 정도. 생각나면 들어 읽고, 그때마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몇 개월 안 읽음. 이유는 나도 모름. 그리고, 이게 올해의 끈기인지 그 반대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거. 

18. 올해의 애니메이션: 사이버 펑크-엣지러너

작년 애니메이션이지만 올해 봤다. 근 미래 아포칼립스물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놓치지 않길 바람. 출시 후 여러 문제로 욕을 먹고 있던 게임인 CDPR의 ‘사이버 펑크’가 다시 견인되는데 큰 시너지를 더했던 작품으로, 나도 이 애니를 본 후 다시 게임을 설치했음.(하지만 여전히 안 함)

19. 올해의 용두사미: 메타의 <Threads>

오픈 후 사용자 수 로켓 라이징을 기록하더니 흐지부지. 나도 열심히 사용해보려 했지만 언제부턴가 아예 잊고 살고 있음. 

20. 올해의 유투버: 중년게이머 김실장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깊은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직장인 유투버. 가볍게 게임의 재미만을 언급하는 다른 게임 스트리머와는 차원이 다르다. 목소리를 더해 함께 진행하는 여자 피디와의 캐미도 역대급. 언젠가 부터 이 유투버의 콘텐츠에 내가 하는 일, 사회, 삶을 빗대어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되었다면 약간 오버일까? 하여간 가장 신뢰하는 유투버 중 한 분.

21. 올해의 인사이트: 유튜브 클립 <세키로를 만들며 프롬소프트가 극복해야 했던 숙제>

게임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클립이지만 UI/UX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싶은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이래도 게임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22. 올해의 난제: 연말 스타벅스 프리퀀시 챌린지

‘아하, 가지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데 골라야만 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 처음 알게 되었음.

23. 올해의 회춘: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함께 일하는 친구가 티켓팅 기간에 알려주는 바람에 참가할 수 있었던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참가가 아니라 관람인가? 어쨌든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가 주변에 있다는 건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축복에 가깝다. 삼일 내내 기자석에서 맥주를 날라다 준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도 무한 감사.

24. 올해의 경이로움: 선인장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잘 키우고 있다.(알아서 잘 크는 것일 수도 있음)

25. 올해의 스쳐 지나간 인연: 박세리

성수동을 지나가고 있는데 앞에서 아는 것 같은 사람이 다가오길래 우선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부터 했지. 그러자 그녀는 ‘잘 지내시죠?’하고 유유히 나를 지나쳐 갔다. 생각해 보니 박세리였음. ‘잘 지내시죠?’라니요? 우린 태어나서 서로 처음 봤는데…

26. 올해의 예언: 인류의 위기가 곧 옴

앞으로 1~2년 사이에 엄청난 인류 직업군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NLP(Natural Language Processing)는 이런 아포칼립스적 전개의 나비 날갯짓인 동시에 정부에서 기업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단초端初. 단지 노동자 계급뿐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등의 카르텔까지 급격한 지각변동급 변화를 가져올 텐데 이로 인해 사회는 꽤 혼란스러워질 것. 모르는 것은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됨. 공부하시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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