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개설

이 곳에서 처음 해야 할 일은 은행 계좌를 트는 일이었다. 집을 구해도 계약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친구 중 하나가 미국 계좌를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편하다고 조언해준다.

맵을 검색 해보니 마침 호텔 근처에 은행이 있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조금 전 봤던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호텔 로비를 나섰다. 분명히 길을 건너 건물을 끼고 돌아가면 은행이 있어야 할 텐데, 은행 대신 커다란 편의점이 있다. 물론 서울에서도 늘 그랬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편의점으로 들어가서는 손톱깎이와 세면도구 그리고, 멀티 충전기를 구매했다. 나중에 편의점에 가야 할 때 지금처럼 빨리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편의점을 나와 근처를 빙빙 돌다 보니 주변이 마치 서울 집 근처처럼 친근해졌는데, 그때쯤 은행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은행은 호텔에서 검색했던 은행은 아니었는데, 호텔 근처는 마켓스트리트라는 번화가로 꽤 많은 은행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은행 출입구의 커다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몇몇 손님들이 앉아있다. 나도 빈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오른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책상마다 어카운트 매니저들이 고객을 앞에 두고 상담을 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하면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그냥 내일 올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어카운트 매니저가 상담을 끝내고는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음 손님, 오세요.”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고 계속 서로 떠들고만 있다. 모두 자신들이 이 곳에 왜 앉아있는지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 온 이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상담 장소로 이동했다.   

어카운트 매니저는 싱긋 웃으며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미리 준비해왔던 여권을 보여주니 바로 계좌가 개설된다. 앞의 손님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신들린 독수리처럼 키보드를 두들겨대더니 바로 체크카드를 만들어주면서, 계좌에 돈이 들어오면 신용카드도 바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신용은 없지만 신용카드는 잘도 만들어진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건물을 나올 때까지, 어카운트 매니저는 계속 ‘다음 손님’을 외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번호표와 상담석 위의 전광판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쉽게 은행 일을 끝내고 나니 배가 고파져서, 저녁을 먹으러 호텔 옆 푸드코드에 갔다. 메뉴가 너무 복잡해서 대체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포스 앞에서 인상 날카로운 멕시칸 여자가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앞에 서니 ‘으흠~?’ 하면서 턱과 어깨를 살짝 든다. 이건  아마도 ‘뭐 먹을래?’

”당근 케이크요.”

‘당근 당근 케이크죠’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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