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24-3-9

꽤 애매한 온도야. 영하에서 탈출했으니 두터운 아우터는 규칙에 어긋날 것만 같은 날. 이 정도면 건물도 난방을 하지 않아. 바람만 막아도 견딜만한 날씨니까. 하지만 따뜻한 날은 분명히 아님. 이런 날 따뜻한 건 하루 종일 저온에 둘러싸여 온기를 강탈당할 내 몸뚱이뿐이라는 거. 봄날을 기대하며 집을 나서지만, 대부분 하루종일 등에 냉혈동물을 업은 것처럼 무거운 걸음을 걷게 돼. 그렇게 온기 없이 으스스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하루에 진절머리가 나는 거야.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샌프란시스코의 아침이 늘 그랬어. 낮은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도, 밤만 되면 해변의 안개가 도시로 밀려들어오면서 기온이 곤두박질쳤거든. 그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캘리포니아가 추울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하지만 그 추위는 귀가해도 피할 수가 없다고. 렌트한 곳이 130년 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이었으니까. 창문을 닫아도 그 틈으로 칼바람이 밤새 밀려들어왔어. 샌프란시스코의 건물에 에어컨은 없어도 히터는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물론 히터도 소리만 요란할 뿐 찬 공기를 덥혀주진 못했지. 이불속에서도 추위를 극복할 수 없을 때의 절망감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니까. 마크 트웨인이 ‘내가 겪은 가장 쌀쌀한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라고 중얼거렸을 때는 분명히 밤이고, 침대 속이었을 거야. 나는 확신해.

그때는 뭐 그런 날씨가 다 있나 싶었는데, 그게 바로 – 낮의 온도는 그곳이 10도 정도 더 높긴 하지만 – 요즘 서울의 날씨야. 하지만 이중창, 단열, 온돌로 대비된 우리나라에서는 그곳에서처럼 다음 날까지 연결되는 추위는 경험할 수 없지. 집에만 들어오면 다시 리셋이 가능하니까. 

유튜브 클립이 끝나기 전에, 쇼츠가 끝나기 전에, 릴스가 끝나기 전에 다음으로 넘기는 경우가 꽤 많아졌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흥미가 없으면, 가끔은 괜찮다고 생각해도 ‘다음’으로 넘겨버린다. 사실은 마음에 들기 전에, 흥미를 당기는지 확인하기 전에 넘겨버리는 경우도 많아. 유튜브 뮤직을 구독하고 나서는 음악도 그렇다는 거. 큐레이팅 기능 덕에 접하게 되는 새로운 곡들은 대부분 조금 듣고 넘겨버리게 돼. 아직은 애정하는 곡은 아니니까. 아직은 좋아하는 음악가가 아니니까. 전혀 죄책감 없이, 냉정하게 첫 소절에서, 싸비에서, 심지어는 보컬도 나오기 전인 인트로 연주에서 -> 다음, 다음, 또 다음. 

‘기후동행카드’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처음엔 무슨 프로모션 크레디트 카드인가 보다 했지 뭐야. 이름이 뭐 저래? 어쨌든 이 카드로 충전 기간 동안 지하철과 버스를 – 서울 내에서만 가능하지만 – 무제한 사용할 수 있다는 거야. 대충 계산을 해봤지. 한 달 사용요금이 내 한 달 교통비보다 20% 이상 높았어. 나는 거의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마냥 살아가는 게으른 사람이니까. 물론 속도는 다람쥐가 훨씬 빠름. 

그런데 사고 싶다. 삶이 엄청나게 다이내믹 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길을 걷다가 갑자기 옆에 정차한 버스에 올라탈 수도 있고,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면 다시 내려 지하철을 탈 수도 있겠지. 그 덕에 처음 걸어보는 거리에서 괜찮은 카페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알다시피 나는 랩탑부터 책까지 이것저것 잔뜩 들고 다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도 짐을 풀어 무언가를 할 준비가 되어있거든. 

반팔니트는 왠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 않아? 애초에 니트는 따뜻하고 싶어서 입는 거잖아. 왜 반팔이야? 겨울에 입으면 팔이 추울 테고, 여름엔 몸통에서 땀이 날 텐데 말이야. 그런데 묘한 매력이 있어. 주변을 한번 돌아봐. 흰색 반팔니트를 입은 사람은 정말 못 참을 정도로 멋지다니까? 이건 내가 꽤 오랜 경험에 의해 일반화시킨 논리라고. 흰색 반팔 니트는 절대로 아무한테나 어울리지 않거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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