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 미니게임

언제부터인가 건널목 신호등에 적색 잔여 시간 표시등이 생겼다. 녹색불이 켜질 때까지 남은 시간을 친절하게 카운트다운 해주는 전광판이다. 건널목에서 멍하니 대기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그 붉은 숫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서울시의 교통안전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적색 잔여 시간 표시는 무단횡단을 46%나 줄였고, 보행자가 신호등을 바라보는 비율을 9.4% 증가시켰다고 한다. 만족도도 72%에 달한다니 시 입장에선 꽤 쏠쏠한 성공작인 셈이다. 수학과 출신에 지독한 ‘T’ 성향을 가진 나로서는 저 통계 수치의 표본과 오차범위를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일긴 하지만, 나 역시 횡단보도 앞에 서면 그 카운트다운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물론 이전에도 ‘도대체 언제 바뀌는 거야’라며 신호등을 쳐다보고 있긴 했음)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 이 카운트다운은 정확히 ‘6초’가 남은 시점부터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전광판의 존재는 알아도 이 디테일까지 눈치챈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살면서 신경 써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라진 6초’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유가 몹시 궁금해졌다. 고유가 시대의 눈물겨운 전기 절약 방안인가? 아니, 이건 호르무즈 해협 위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북한 간첩의 남파 작전을 교란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숨길 게 따로 있지 고작 녹색불 켜지는 타이밍을 감출 리는 없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 시민들의 시력 보호를 위한 보건 정책은 아닐까. 확실히 그 시뻘건 LED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좀 시리긴 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부 틀렸다.

위에서 이야기한 교통안전 보도자료 한 구석에는 그 ‘6초의 비밀’도 적혀있는데, ‘보행자가 미리 출발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6초 이하가 되면 카운트다운을 멈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행자가 ‘3, 2, 1, 출발!’ 하며, 한껏 뒤로 끈 고무줄 미니카처럼 도로로 튀어 나가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뜻이다. 확실히 6이 보여야 할 타이밍에 전광판이 꺼져버리면, 팽팽하던 시각적 텐션이 툭 끊기긴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 우리 혈관에 흐르는 유구한 ‘빨리빨리’ 본능이 잠들리는 없잖아? 게다가 나는 동물적 리듬감각을 가진 인간 메트로놈으로 닌텐도의 ‘리듬천국’ 시리즈의 올 금메달을 달성한 인재이기도 하다. 

눈앞의 숫자가 사라지면 마음속으로 카운팅 하면 그만이다. 숫자가 사라지는 그 6초의 시점부터, 내 안에서는 아주 정교한 메트로놈이 딸깍거린다. 외부의 시각적 카운트다운은, 암전과 함께 내면의 심리적 카운트다운으로 전이된다. 예측 출발을 포기하기는커녕, 출발선에 선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아킬레스건의 텐션을 잔뜩 끌어올린 채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이 정책의 가장 큰 맹점은 사람들을 얌전하게 만들기는커녕, 완벽한 타이밍에 횡단보도를 딛기 위한 고도의 ‘도심 속 미니 게임’을 창조해 버렸다는 데 있다. 눈앞에서 숫자를 치워버리면 사람의 뇌에서도 숫자가 증발할 거라 믿은, 꽤나 순진하고 귀여운 탁상행정 아닌가? 아니 어쩌면 100세 시대 시민들의 뇌 기능 저하를 막아주는 일상 속 훌륭한 치매 예방 정책일지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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