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천사가 존재하나요?: OA

얼마 전에 우연히 넷플릭스의 큐레이팅 로직에 이끌려 O.A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이 드라마의 설명을 보기 위해서는 단지 이름뿐만이 아니라 ‘드라마’ 혹은 ‘넷플릭스’ 같은 추가 단어를 덧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취업 준비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무 자동화 Office Automation 관련 자격증에 대한 정보만 잔뜩 접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MOS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 제품 활용능력 평가) 자격증이나 ITQ (정보기술관리 국가 자격증) 자격증 등이 궁금하다고 클릭하게 되면, 드라마 OA에 대한 정보는 영영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는 타인에게 추천하는 것을 살짝 고민을 하게 될 정도로  취향을 탈만한 소재와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글에서 한번 만나고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라면 한번 과감하게 추천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다.

간단한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맹인인 주인공 프레이리(OA)는 어렸을 때 양부모님을 떠나 친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헌터라는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박사에게 납치되어 비슷한 다른 네 명과 함께 지하에 갇혀 7년 동안 연구실험체로 노예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게 된 그녀는 집에 돌아와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물론 스토리가 아주 치밀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성/편집의 퀄리티가 높아서, 지루하다는 생각 없이 끝까지 하루 만에 완주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각본가이기도 한 브릿 말링은, 조지타운 대학에서 경제학 전공했는데 유명한 투자은행의 인턴으로 일하다가 염증을 느껴 배우 및 각본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 이야기도 있고, 배우로 활동하려 했을 때 전형적인 금발 여배우 배역만 들어오는데 염증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일한 기사에서 염증의 서술 부분에 대한 번역을 누군가가 잘못한 것 같은데, 어쨌든 – 대상은 불분명 하지만 – 어딘가에 염증을 느낀 것은 확실한 것 같고, 덕분에 우리는 이런 특이한 각본의 드라마와 연기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흥미로우면서도, ‘이거 다 헛소리 아니야?’하는 의심을 중간중간했었는데, ‘여기서 이게 다 헛소리라면… 안돼. 지금까지 드라마를 보기 위해 소비했던 내 시간은 뭐가 되는 거지?’ 하며 제발 OA(여주인공)가 천사이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마지막 회에서 조연들의 덜떨어진 듯한 퍼포먼스를 보며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말았는데, 솔직히 내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로 드라마 중간쯤에 주인공인 OA가 심리치료사와 함께 상담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심리치료사가 했던 대사가 꽤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그거 알아요? 음. 왜 허그가 위안이 되는지? 제가 보기엔 이래요. 허그는 고통의 범위를 한정해 주거든요. 이해 가죠? 팔을 두르는 그 주변 정도로..’

Hey, you know why we, uh… why we like to be hugged? The way I see it, it sets a limit on the pain. You know? Puts a perimeter around it.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혼자 살 때 한 번은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아침 새벽에 집을 나섰는데 그곳 답지 않게 너무 억수 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우산도 없었다.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는 어깨를 때리는 빗속을 터벅터벅 걸어 목적지 건물로 들어서니, 로비의 소파에서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거기에 털푸덕 앉아 빗물이 섞여 싱겁고 차가워진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퀴퀴한 가죽 냄새가 커피 향을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그때, ‘여기서 대체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거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는 스피드게이트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데, 마침 정문에서 친구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어디 가?’


‘… 응. 안녕? 집에 가려고.’

그때,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친구가 천천히 내게 두 팔을 둘러 허그를 해주었다. 그곳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허그를 해대서 별다른 일도 아니었지만, 그 허그는 좀 달랐다고 생각한다. 내 표정을 읽었던 것 같은 그 친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고 힘이 들어간 허그를 해주었고, 나는 그날 건물을 벗어나지 않고 다른 날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때 받았던 인생 최고의 위안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고, 덕분에 드라마의 그 장면에서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람은 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만, 또 사람 덕에 그것을 이겨내기도 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의 마지막 편 엔딩 크레디트의 다른 모든 감사해야 할 사람들 맨 앞에서 ‘In Memory of Allison Wilke’라는 추모글을 볼 수 있는데, 찾아보니 그녀는 드라마 제작 중(혹은 후)에 유방암으로 사망한 이 드라마의 보조 PD 였다고 한다. 이런 것도 조금은 따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든, 나와 친분이 없는 분들께는 다시 한번 이 드라마를 추천해 본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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