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신작, ‘일인칭 단수’

한참 발표자료를 마무리짓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문제가 있는 한 페이지에 대해 열띤 토론 중이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절규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 혹독한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페이지에 희망을 얹고 싶었을 뿐이었다. 의지를 더해서라도 말이다.

‘솔직해야 하지만, 괜찮게도 보여야 하는 거잖아?’

분명히 그건 힘든 일이지만, 불가능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빈틈을 비집고 ‘아하’ 하는 느낌을 상대방의 머릿속 빈 공간에 떠오르게 만들어야만 한다. 빈 공간이든, 꽉 찬 공간이든, 뭐든 말이다. 그때였다. 알람이 울린 건. 순간 나는 그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 출간 기념으로 소진 시까지 ‘일인칭 단수’ 스티커 팩을 드립니다’

회의 중에 메시지를 들여다보다니, – 그것도 일대 다一對多로 대치하던 설득의 순간에 – 그건 평소의 나와 달랐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메시지 뒤에 숨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서점 앱을 설치한 지 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알람이 울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얼마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의 중에 메시지를 확인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알림을 확인하는 내가 낯설었고, 그러던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낯설었으니까. 그렇게 애매한 상황에서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티커 팩 때문은 아니다.

그날 서점으로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들어 ‘일인칭 단수’를 검색했다. 책 소개 페이지에는 벌써 140건의 리뷰가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발간이 된 날 보낸 메시지는 아닌가 보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바로 손가락이 시려왔다. 아침 뉴스에서 올해 들어 최고로 추운 날이라고 했었다. 손끝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느끼며 위로 화면을 밀어 올렸다. 언제나처럼 칭찬도 많고, 실망했다는 글도 많았다. 나는 주욱 훑어 내려가다가 손가락이 얼얼해지는 바람에 ‘그런데, 생각보다 책이 얇아요.’라는 리뷰를 마지막으로 폰과 손을 모두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말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훅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언 손가락이 뎅강뎅강 부러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걷는 내내 그 리뷰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리뷰어는 책이 ‘얇다’고 했다. 그는 왜 감상이 아닌, 관찰을 댓글로 달았을까? 책의 내용에는 만족한 걸까? 아니, 적어도 두께는 마음에 들긴 한 걸까? 그 문장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문장은 마치 논문의 일부처럼 드라이하고 명확하게 – 감상을 배제한 채로 –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그는 댓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한 걸까? 물론 그런 기대 따위는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있었다면?

‘그런데, 생각보다 책이 얇아요. 서점에서 훅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요.’

이후 바로 ‘그렇다면 한번 서점에서 다 읽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은 다시 결심이 되어 버렸다. 요즘 나는 그런 게 필요했다.

코로나 덕분에 최근 몇 달 동안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직행이었다. 평소에도 딱히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패인 홈을 따라 물이 흐르듯, 2차 대전 독일군이 프랑스를 치기 위해 아르덴 숲을 가로지르듯, 필사적으로 앞만 보고 집을 향해 걷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파격의 날, 적군의 진지에 침입하여 아무도 모르게 적장의 목을 벤 후 귀신처럼 다시 빠져나오는 전설 속의 전사가 되는 거다. 그 댓글 리뷰는 내게 히틀러처럼 지시하고 있었고, 나는 괴벨스처럼 그 명을 받들어 서점으로 거위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가장 가까웠던 아담한 서점에는 생각대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신간을 쌓아놓은 진열대 앞에 서서, 수십 권의 ‘일인칭 단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말 그런 리뷰를 쓸 만큼 얇았던 그 책은 여덟 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돌베개에’, ‘크림’, ‘찰리 파커 블레이즈 보사노바’ 그리고, ‘위드 더 비틀스’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서점을 나와 집을 향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잠실의 대형서점에 가서는 아홉 시 삼십 분, 입구가 열릴 때까지 문 밖에 서 있었다. 아침을 일찍 먹기도 했고, 오픈 시간을 잘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물론 미리 가서 문 앞 대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픈을 담당하는 직원은 밖에 서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 나 혼자 뿐이었다 – 아홉 시 이십사 분에 입구를 개방해 주었고, 나는 바로 베스트셀러 진열장 앞에서 ‘일인칭 단수’를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사육제’,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차례차례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처럼 순서대로 읽어나갔더니, 이내 마지막 소설인 ‘일인칭 단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 소설은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짧았다.

전날 읽었던 앞의 반절은 ‘역시!’하며 감탄하듯 읽었고, 다음날 읽었던 뒤쪽 반절은 ‘뭐 그냥’하면서 덤덤하게 읽었는데 굳이 총평을 해보자면 ‘괜찮았다’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장편 소설이나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단편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좀 드물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단편을 좋아한다.

장편은 숨이 길기 때문에 작가 나름대로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문장력으로 승부하는 작가도 있고, 그건 좀 떨어져도 스토리로 밀고 나가는 작가도 있다. 어쨌든, 능력이 부족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더라도 괜찮은 장점 하나로 꿋꿋하게 밀고 나가면, 독자는 읽는 동안 그 장점에 기대어 결국 어느 정도 만족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관대하기 때문이다. 아니 관대하다기보다는 날카롭지 못하다. 하지만, 단편의 경우에는 얄짤 없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뭐 하나도 제대로 보여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단편은 대부분 어설퍼 보인다. 어영부영한 스토리에 별 감동 없는 문체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바로 단편의 세계인데, 하루키의 단편은 조금 다르다. 뭔가 말로 설명이 잘 안될 것 같긴 한데, 억지로 표현해보자면 ‘이상한 모양인데, 희한하게 완벽하다’ 정도일 것 같다.

뒤쪽의 작품들은 누가 봐도 하루키가 주인공인 에세이 같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것도 모두 소설이었다.(그는 ‘야구르트 스왈로스 시집’을 독립 출판한 적이 없다) 나는 마지막 단편인 ‘일인칭 단수’까지 훅 읽어버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서점을 걸어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열한 시가 채 되지 않았었다.

완벽한 리뷰였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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