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코딩

이시구로 카즈오 Kazuo Ishiguro(1989)의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은 고지식하고 답답한 집사의 연민과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고급스럽게 그린 소설입니다.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담담하고 성실하게 풀어내는 – 마치 엄마의 집밥 같은 –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면 끝까지 책을 놓을 수가 없죠. 그러고 보니 그가 노벨상을 탄지도 벌써 오 년이 지났네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새침데기 집사가 오랫동안 사모했던 켄턴 양과 재회하는 장면입니다.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그녀와 허무하게 헤어진 후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어떤 노인과 선창 파티에서 대화를 하는 부분이에요. 그 노인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집사를 오랫동안 하고 은퇴를 한 사람이었죠. 제임스는 그 노인에게 집사업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줍니다. 대규모 행사 감독법, 업무상의 기밀 그리고, 잘 이행하기 위한 여러 속임수까지… (더럽게 지루했을 것 같음)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신세한탄까지 쏟아내죠. 피동적으로 주인의 선택을 따랐던 것에 대한 공허함이 밀려들어 그는 끝내 눈물까지 보입니다.(진상이 따로 없음) 그의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이봐요.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된 거예요. 알겠어요? 늘 그렇게 뒤만 돌아보면 안 돼요. 우울 해질 뿐이거든요.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다고요.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노인이 자리를 뜨고 난 후 그는 저녁 선창 이벤트에 사람들이 즐겁게 모여있는 것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독자에게 이야기하죠.

What is the point of worrying oneself too much about what one could or could not have done to control the course one’s life took? Surely it is enough that the likes of you and I at least try to make our small contribution count for something true and worthy

저 부분이 제가 특히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처음에 제가 옮겼던 번역은 이랬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선택을 통제하기 위해 할 수 있었거나 혹은 그럴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 너무 많은 고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확신하는데, 나는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최소한 진실하고 가치 있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작은 기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좀 딱딱하긴 하지만 원래 문장이 그런 걸 어쩌겠냐 싶었죠. 언젠가 저 부분에 대해 원어민인 친구와 이야기를 꽤 오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평이한 문장 속의 심오한 인생철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옮긴 글을 본 친구는 내 번역이 마음에 안 든다고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Ok. I’ll wait.’ (하지만, 그게 되겠어? 한국어는 내가 더 잘할 텐데?)

그리고, 다음날 저녁 언제나처럼 바닥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왔습니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선택하는 데 있어 본인이 할 수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소한 당신과 나 같은 이들이 진실되고 가치 있는 무언가에 우리의 작은 기여가 보탬이 될 수 있게 노력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보는 순간 내 번역문이 거지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갑자기 궁금해져서 정식 출간된 번역서를 찾아봤더니, 송은경 씨는 출간된 ‘남아 있는 나날’에서 같은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아니 태운다는 대체 말이 어딨어? 어쨌든, 둘 다 제 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좋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네요. 제 번역의 문제는 작가가 전하려 했던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보다 문장의 요소를 빠뜨리지 않고 보존하는 것에 더 집중한 것이겠죠? 하지만, 만약 저 번역 작업이 사람이 읽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Operation System이 인지할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 랭귀지 포팅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입니다.

제 것이 제일 잘 작동할 겁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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