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던 게 말이다. 

정리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끝도 없이 해야 한다는 거였다. 인터넷, 전기, 그리고 가스도 모두 다른 기관을 통해 출발하는 날로 정지 요청을 했고, 열 달 전 집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집주인 할머님을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며 렌트 종료 작업을 했었다. 렌트비는 매달 우체국을 통해 수표로 받기를 원했어서 인터넷 입금을 못하시나 보다 했는데, 그때 그녀는 ‘디파짓은 계좌로 이체해줄게. 은행과 계좌번호 불러봐’ 하셨더랬다. 수표로 받으면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은 해결됐지만, 지난 12개월 동안 매달 수표를 우체국에서 보냈던 수고가 떠오르기도 했다.(우체국 직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느려 터졌었음)

큰 짐들은 이삿짐센터를 통해 서울로 보냈고, 유쾌한 멕시코 출신의 작업 인부들은 내게 나이프를 빌려 그대로 가지고 가버렸다. 친구에게 빌렸던 물건들은 모두 깨끗하게 정리해서 돌려주었고, 중고 음반 시장을 돌아다니며 건졌던 음반들과 아마존에서 구매한 턴테이블은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넘겨주었으며, 이불, 매트리스, 책상 등은 지역 센터에 기부했다. 냉장고에 가득했던 이런저런 식재료는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이사를 생각한다면 한 달 전부터는 굶더라도 냉장고에 뭘 사 넣으면 안 된다)
인터넷에 주문했던 물건들 중 무선 이어폰과 택배 해체용 나이프는 제때 도착하긴 힘들 것 같아 마음을 비웠고, 원데이 쉬핑으로 주문한 기계식 키보드와 무서운 성능의 무선 공유기의 도착을 마지막으로 장장 일 년 동안 지속되었던 아마존 쇼핑도 무사히 마감했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정원 화분 뒤쪽으로 택배를 잘 숨겨주었던 아마존 택배 아저씨는 잘 계시겠지?

출발 전날, 그곳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는 근처 거리에 열린 주말 장에서 계란, 시금치, 버섯, 모차렐라 치즈를 샀다. 그리고, 그 옆 과일 수레에서 두 종류의 플럼을 한 봉지 가득 담아 왔다. 엄마는 늘 세끼는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고 했었다. 물론 그다지 말을 잘 들었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출발하는 날 아침, 어제 산 재료를 모두 넣고 어설픈 오믈렛을 만들었다. 몇 주 전 어바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집에 갔을 때, 그가 직접 해주었던 요리였다. 왜 그게 먹고 싶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때 그 친구를 또다시 보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심심한 오믈렛을 먹었더랬다. 물론 친구가 만들어 준 오믈렛이 훨씬 더 맛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는 한 봉지 가득 담긴 플럼도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버렸다. 

‘이제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어.’

머릿속에서 그렇게 나 자신에게 이야기한 후 집 앞으로 우버(택시)를 불렀고,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다이내믹했던 일 년은 저물고 말았다.


매번 정리하는 것이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고 힘들었던 것 같다. 수고는 비슷하다 할지라도 정리할 때의 공허함과 쓸쓸함은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이나 기대와는 상쇄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크기의 차이가 상상도 안 되는 것을 보면, 그 둘은 원래부터 비교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들은 대부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나가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내가 살던 캘리포니아 스트리트의 그 집에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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